이 바로 관음포의 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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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이 바로 관음포의 바다이다.
그런데 관음포에 있었던 또 다른 역사적 사건을 빼놓을 수가 없다.
노량해전보다 200여 년 앞선1383년에 벌어졌던 정지 장군의 관음포 해전이 있다.
정지 장군의 관음포 해전은 최영의 홍산대첩(1376년), 나세·최무선의 진포대첩.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설명 안내문 삼불회괘불탱, 오불회괘불탱 [유튜브 채널 정용식의 사찰 기행 캡처]1383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조 실록을 칠장사에 옮겨와 8년간 소장해 소실을 면한 일도 있다고 한다.
- 정도전, 장량을 자처하다 -1383년가을, 한양 삼각산 아래에 ‘삼봉재’를 짓고 칩거하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함흥에서 야인을 물리쳐 명성을 떨치던 이성계를 찾았고, 한나라를 세운 한 고조의 군사 전략가 장량(張良)을 자처했다.
침략했으나, 정지와 지용기가 격파해 17명의 목을 벤다.
이 공을 인정받아 정지는 정3품 벼슬인 전라도 순문사에 임명된다.
1383년(우왕 9) 5월, 정지는 전함 47척을 거느리고 나주, 목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적선 120척이 경상도 연해에 출몰한다.
친구지간에 돈 없는 걸 비웃는 건 무슨 심보인가요? 아마도 다른 곡절이 있을거라 믿고 싶습니다.
[앵커]마지막 소식 전해주시죠1383년에 지어진 치앙마이의 대표적 사원 '왓 프라탓 도이수텝'.
수행이 목적인 사원의 화려한 금칠에 반감이 생길 법도 한데, 기실 내막을 알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1383년에 세워진 이 사원은 치앙마이를 수도로 삼은 망라이왕의 란나왕국(13~16세기)에 중요한 상징이었다.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년) 간행된 이후 여러 차례 인경돼 전국 사찰 등에 봉안됐다.
하지만 많은 인경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1383년본’(고려 우왕 9년 인경·일본 교토 오타니대 소장) ‘1458년 본’(조선 세조) ‘1865년 본’(해인사 인경) ‘1899년 본.
그래야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다.
민씨는 18세의 나이로 두 살 연하의 이방원과 결혼한 이듬해인1383년(우왕 9년)에 정순공주를 낳고 남편이 정안군 시절 요절한 세 명의 아들 등 총 12명의 자식을 두었다.
위해 남경(지금의 서울) 삼각산 아래에 삼봉재(三峯齋)라는 학당을 열었으나 그마저 견제를 받아 부평, 김포로 떠돌아야 했다.
1383년(고려 우왕 9) 개나리 봇짐에 원대한 조선 건국(朝鮮 建國)의 포부를 담아 머나먼 함주(함경도 함흥)의 이성계를 제 발로 찾아갔을.
왜구를 토벌한 역사적 근거가 기원이다.
홍산대첩은 최무선의 진포대첩(1380년), 이성계의 황산대첩(1380), 정지의 관음포대첩(1383년)과 함께 고려말 4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올해 홍산대첩문화제는 제례, 부여군충남국악단의 진혼무 등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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